[재계인물정보]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KJtimes=장우호 기자]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952년 2월 7일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故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와 故 강태영 여사 사이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다가 196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4년 멘로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고 1976년 드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 전두환 정권 때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서정화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의 장녀 서영민씨와 결혼했다.

1977년 태평양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로 입사했고 이듬해 사장에 올랐다. 1981년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화약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1982년 한양화학(現 한화케미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하면서 석유화학 사업에 진출했다. 1983년 경인에너지(現 SK인천석유화학) 내국화를 단행했다. 1985년 정아그룹(現 한화호텔&리조트), 1986년 한양유통(現 한화갤러리아)을 인수하면서 3차산업에 진출했다.

1990년 경향신문사를 인수한 뒤 1992년부터 경향신문사 회장을 지냈다. 해외 진출을 추진하며 1993년 아테네은행, 1996년 헝가리 엥도수에즈 부다페스트은행(現 헝가리 한화은행) 등을 인수하고 회장직에 올랐다.

2000년 한화석유화학 회장을 지냈고 2002년 대한생명보험(한화생명)을 인수해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2005년 한화그룹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2006년 유엔한국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2008년 한화그룹 대표이사 회장에 재취임했다가 현재는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회장직만 유지하고 있다.

체육단체에서도 다양하게 활약했다. 1982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회장, 대한아마추어복싱연맹 회장, 1985년 빙그레이글스 구단주, 2009년 국제복싱발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대의 나이에 갑자기 그룹 총수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1981년 1조원에 불과하던 한화그룹의 매출을 2017년 50조원으로 크게 성장시키며 뛰어난 경영 수완을 보여줬다. 한화는 금융, 전자, 유통, 레저, 사회복지 등 3차산업을 강화하며 성공적인 제2의 창업기를 보냈다.

1982년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한양화학 인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한양화학의 대주주였던 다우케미칼이 철수하는 것을 두고 석유화학 업계에 불황이 닥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를 다우케미칼 본사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 판단하고 모든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혼자 밀어붙이면서 특유의 협상 능력을 발휘해 당초보다 싼값에 한양화학을 인수할 수 있었다.

1983년 미국 유니언오일사와 1969년 합작해 설립한 경인에너지의 경영권 확보에서도 김 회장의 ‘뚝심’은 잘 드러난다. 한화측에 불리한 계약서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 회장은 유니언오일의 한국 경영진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 같은….’이라는 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999년 한화이글스의 우승 축하 파티에서 홍선기 당시 대전시장으로부터 대덕테크노밸리사업을 제안 받았다. 이 사업은 타기업의 포기로 10년 이상 방치된 대전의 숙원 사업이었다. 김 회장은 그룹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역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강행했다.

2001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2009년 11월 5일 성공적인 준공식을 갖고 기존의 도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산업, 주거, 교육, 문화, 레저가 어우러진 신개념의 직주근접형 첨단복합단지로서 국내 최초의 도시개발 성공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구조조정의 마술사’로 불렸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수많은 기업이 도산할 때 한화 역시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다. 한화는 한화바스프우레탄, 한화 NSK정밀, 한화GKN, 한화기계 허브아이 베어링부분, SKF한화자동차부품, 한화자동차부품 등 합작법인 지분을 과감히 처분하는 등 체질을 개선했다.

한화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각 금액을 줄이더라도 고용 100% 승계를 원칙으로 정했다. 그러나수많은 계열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50∼60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게 되자 김 회장은 사내 방송을 통해 “선대 김종희 회장이 한화를 창업한 이래 이런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다”면서 “나는 그들의 가정에 많은 고통을 준 가정파괴범이며 만일 내가 경영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의리파 총수로 알려져있다. 대표적인 예가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매각할 당시 100% 고용승계를 약속받은 일이다. 이 매각협상은 김 회장이 직접 정몽혁 당시 현대정유 사장에게 찾아가 “우리(한화)가 20~30억원 손해 봐도 좋으니 한화에너지 출신 직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하지 말라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실제 정 사장도 계약 성사 후 한화에너지 706명과 한화에너지프라자 456명에 대한 완전한 고용 승계를 이뤄냈다.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현대정유에서 자발 퇴사한 직원 수십명을 모두 한화에서 재수용했던 사실은 재계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프라자호텔이 전면 리모델링으로 불가피하게 3개월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공사기간동안 모든 직원에게 유급휴가를 준 사례도 있다. 2014년 경영에 복귀한 뒤 한화건설 이라크 공사현장을 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광어회 600인분을 비행기로 공수하기도 했다. 사막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회라는 말 한마디에 진행된 일이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2011년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유가족을 위로하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검토하라는 김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동시에 천안함 성금으로 5억원을 내놨다.

천안함 희생자 46명 중 36명의 유족이 한화에 취업을 희망해 현재 총 12명이 각 계열사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천안함 유족에 대한 채용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으며 한화 이글스 경기에 천안함 유가족을 초청해 시구 행사도 진행하고 임직원들이 천안함 묘역을 찾기도 한다.

미국 해군정보국 정보분석가로 일하다 국가 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19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연방교도소에 수감됐던 로버트 김을 지원했다. 김 회장의 로버트 김 지원은 주위사람과 회사 내 측근들도 알지 못한 채 조용히 2003년 7월 후원회가 정식 발족할 때까지 이어졌다.

특히 로버트 김이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수감된 탓에 미국 정관계 인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김 회장으로서는 용기있는 일을 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사실은 2005년 10월 MBC 라디오 프로그램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 로버트 김이 출연하면서 알려졌다. 로버트 김의 징역 기간이 끝나자 그 동안 심려끼쳐 죄송하다며 한화 전 직원에게 보너스를 얹어주기도 했다.

복합문화예술공간인 예술의전당이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후원 확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교향악 축제’를 10년 동안 단독으로 후원했다. 교향악 축제는 예술의전당이 클래식음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야심차게 기획했던 클래식 축제다.

교향악 축제는 한화의 후원 이후 전국 20여개 교향악단이 참여하고 3만명 이상이 관람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클래식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예술의 전당은 2009년 4월 한화그룹의 후원 10주년을 맞아 김 회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종신회원증을 전달했다.

2011년 9월 14일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있던 한국 프로야구계의 레전드 투수 최동원이 지병으로 별세하자 그의 병원 치료비와 장례식 비용을 그룹 차원에서 지원했다. 한화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거뒀던 1999년에는 정직원뿐 아니라 협력직과 미화직 등 전 직원에게 수십만원의 특별 포상금을 준 바 있다.

2015년 7월 3일 울산광역시 소재 한화케미칼 폭발 사고로 협력업체 직원 6명이 숨지자 사고 희생자들에게 한화그룹 임직원에 준하는 보상을 지시했다.

동생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과 형제 간 재산다툼을 벌였다. 1991년 빙그레와 제일화재가 계열분리되면서 김 회장을 비롯한 한화그룹 2세 간 재산 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김승연 회장은 동생 김호연 당시 빙그레 회장과 3년 6개월간 31차례에 걸친 재판을 벌였다. 김종희 창업주가 1981년 갑작스럽게 타계하면서 지분 분할을 두고 명확한 유언을 남기지 않아 분쟁이 터진 것이다.

김호연 전 회장은 주요 계열사에서 밀려난 것에 반발해 “김승연 회장이 본인과 의논하지 않고 임의로 상속재산을 처분했다”며 유산의 40%를 주장하는 재산권 분할소송을 제기했다. 김승연 회장은 이에 맞서 “1981년 당사자 간 합의 등 민법상의 합법절차를 밟아 상속재산이 분배됐고 10년 시효가 끝나 상속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재산권 분할소송과 함께 김호연 회장이 빙그레를 갖고 독립했다. 이 때 프로야구 구단 빙그레 이글스도 한화 이글스로 이름을 바꿨다.

한화가 2세 간 재산다툼은 1995년 모친 강태영 여사 칠순잔치에서 해결됐다. 강 여사의 중재로 형제가 재산분할에 합의하고 소송도 모두 취하했다.

김승연 회장은 모두 3차례에 걸쳐 실형을 선고받았다.

먼저 1994년 불법 외화유출에 따른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돼 50여일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 회장이 받은 혐의는 해외재산도피와 외환관리법 위반이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해외건설공사를 수주한 뒤 되돌려받은 공사 소개 수수료 650만달러를 은닉하고 이를 미국 호화주택을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해외재산도피는 자금조성 시기가 공소시효를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의 경우 1983년 당국의 허가 없이 한화그룹의 미국법인에서 120만달러를 빼돌린 뒤 1993년까지 총 110만 달러를 인출해 가족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 김 회장은 수감 도중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47억원을 선고받고 구속 50여일만에 풀려났다. 1995년 광복절에 특별사면됐다.

2007년 보복폭행으로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대학생이던 김 회장의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는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모 클럽에서 종업원 8명과 시비 끝에 몸싸움을 벌여 크게 다쳤다. 김 회장은 경호원 17명을 대동한 채 해당 업소로 찾아가 당시 싸움을 벌인 종업원 8명을 청계산으로 끌고 가 폭행했다.

이들이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들이 폭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호소하자 쇠파이프와 전기충격기 등을 동원해 업소로 찾아가 무차별폭행을 저질렀다.

여기에 한화 측이 사건 무마와 피해자 회유 목적으로 6억7000만원에 가까운 돈을 사용해 더 큰 문제가 됐다. 한화리조트 김 모 감사는 한화 측 고위간부에게 5억8000만원을 받아 이 가운데 2억8000만원을 경찰 간부 등을 상대로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데 사용하고, 뒤처리를 대신해 준 조직폭력배 맘보파 두목 오씨에게 나머지 1억1000만원을 전달했다. 이외에도 피해자 공탁금으로 9000만원을 사용했다.

검찰은 이 사건 수사 늑장 및 외압 의혹으로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 서울 남대문경찰서, 남대문서 태평로지구대 등 3곳을 압수수색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재판하는 도중 폭행사실을 심문하던 검사에게 “복싱에 대해 잘 아시느냐”고 반문하며 “복싱에서처럼 ‘아구를 몇 번 돌렸다’는 거다”라며 오른팔을 휘두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재판 도중 ‘귀싸대기’ ‘맞짱’ 등 비속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이 결과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고, 이후 양로원 등에서 사회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며 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선고받았다.

2012년 8월 배임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011년 한유통, 웰롭, 부평판지 등 위장계열사 3곳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회사 자금 3000억여원을 부당지원한 혐의다.

그러나 수감 4개월만인 2013년 1월 구치소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집행정지 건의서를 제출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자 수감생활을 종료하고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2013년 4월 항소심에서 이동병상에 누워 법정에 출석해 징역 3년으로 감형, 2014년 2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1억원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한화, 한화케미칼, 한화건설, 한화L&C, 한화갤러리아, 한화테크엠, 한화이글스 등 7개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모두 물러났으나 그룹 회장직은 했으며 2014년 12월 사회봉사시간을 모두 이수한 뒤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2017년 편법 승여 논란을 빚었다. 2010년 경제개혁연대 소장으로 근무하던 김상조 공정위원장을 필두로 한화 소액주주들이 894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김 회장과 한화가 보유한 한화S&C 주식 전량이 김 회장의 세 아들에 헐값에 매각됐다는 것이다. 1심은 김 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경영기획실을 통해 주식가치를 저가로 평가하도록 지시했다며 편법 증여를 목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힌 점을 인정해 9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회사의 경영활동 자유와 재량 관점에서 위법한 주식매매라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고, 2017년 9월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2015년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를 통해 서울 시내면세점 사업권 입찰경쟁에 뛰어들었다. 입찰 초반만 하더라도 신세계와 함께 서울 시내에서 면세점 경험이 전무한 한화갤러리아는 후발주자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면세점 후보지 선정에 고심을 거듭하던 한화갤러리아가 여의도 소재 63빌딩을 후보지로 내세우면서 신라면세점, 현대산업개발, 롯데면세점, 신세계, SK네트웍스, 현대백화점 등 유통대기업들을 이겨내면서 서울 시내면세점 사업권을 획득했다.

그러면서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테크윈(現 한화테크윈), 삼성탈레스(現 한화시스템), 삼성종합화학(現 한화종합화학), 삼성토탈(現 한화토탈) 등을 1조9000억원에 인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 인수 건은 외환위기 이후 국내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으로 꼽힌다. 2016년에도 방산기업 두산DST(한화디펜스)를 인수하면서 국내 방산업계에서 독보적 지위를 굳혔다.

특히 최근 그룹의 새 먹거리로 키우고 있는 태양광분야가 문재인 정부에서 더욱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탈원전∙탈석탄을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비중 20%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화는 2011년 중국지역에 사업확장을 위해 한화차이나를 설립하고 중국 업체 솔라펀파워홀딩스(現 한화솔라원) 지분을 인수해 세계 1위 태양광 셀 생산체계를 구축했다.

자식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부친의 자식교육을 그대로 닮은 것으로, 공부보다도 다양한 경험과 문화, 체육활동을 권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 회장 본인은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고 아들 셋도 병역의무를 이렇다 할 잡음 없이 깔끔히 마쳤다. 한화의 모태가 한국화약이라는 방산업체여서 김 회장이 병역문제에 대해선 확실하게 해야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자 서영민씨와 슬하에 3남을 뒀다.

동관, 동원, 동선 세 아들을 뒀다. 장남 김동관씨는 한화큐셀 전무, 차남 김동원씨는 한화생명 상무를 맡고 있으며 삼남 김동선씨는 한화건설 팀장으로 근무하다가 폭행사건으로 회사를 떠나 있다.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전무는 미국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 김승연 회장과 마찬가지로 공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공군사관후보생 117기로 임관해 공군 작전사령부 기획조정실에서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한화에 차장으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은 뒤 한화큐셀 전략마케팅 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전교 1등을 도맡아 했으며 하버드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에도 한인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회사 생활에 굉장히 성실하게 참여 중이다. 게다가 동생들과는 다르게 구설수 없이 독서가 취미이며 운동은 주짓수와 스키를 즐긴다고 알려져 있다.

한화큐셀에서 영업실장을 맡으며 2017년 회사가 흑자전환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화큐셀은 2017년 1조5000억원 규모의 터키 최대 태양광발전소 건설사업 수주에 성공하고 6억달러(약 6716억원)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민자 태양광발전소 사업 1차 자격심사를 통과하는 등 중동 시장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또 지역별 매출 비중에서 북미(30%), 일본(20%)에 뒤져있는 유럽(10%)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유럽 시장은 세계 최대 태양광 시장이다.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는 미국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뒤 부친, 형과 마찬가지로 공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2014년 한화L&C에 입사했다. 김승연 회장을 실형 선고 받게 한 보복폭행 사건의 당사자다. 2011년 교통사고를 내고 구호조치 없이 도망 가서 뺑소니 벌금 700만원을 선고 받았다. 2014년 2월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삼남 김동선씨는 승마 명문교인 미국 터프트스쿨을 졸업한 뒤 미국 다트머스대학교를 나왔다. 군 복무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마장마술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예술체육요원으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이후 2010년 제16회 광저우아시안게임 마장마술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2012년에는 WC 선샤인챌린지 국제마장마술 그링프리 스페셜 종목에서 3위를 마크했다.

폭행과 관련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2010년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 주점에서 여종업원을 성추행하고 보안직원 2명을 폭행, 유리창과 집기를 부순 혐의 등으로 불구속 입건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017년 1월 강남구 청담동 소재 술집에서 술에 취해 종업원의 뺨 2대를 때리고 다른 종업원의 머리를 2∼3차례 때렸다. 같은 해 3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승연 회장은 김씨의 폭행사실을 들은 뒤 크게 화를 내며 “잘못을 저지른 만큼 벌을 받고 깊이 반성하라”고 지시했다. 김씨는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돼 경찰서로 호송되던 중 순찰차 내부 유리문과 카시트를 걷어차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한화건설에 과장으로 입사한 뒤 2016년 차장으로 승진했으나 이 사건으로 회사를 그만 뒀다.

그러나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같은 해 9월 서울 종로구 소재 술집에서 열린 대형 로펌 소속 신입 변호사 10여명의 친목 모임에 동석해 만취한 상태에서 변호사들이 부축하자 한 변호사의 뺨을 때리고 다른 변호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 폭언과 함께 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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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생년월일: 1952년 2월 7일
직업: 기업인
직함: 한화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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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정보

관계 

이름 

생년월일 

비고 

부 

김종희 

1922년 11월 12일~1981년 7월 23일 

한화그룹 창업주 

모 

강태영 

1927년~2016년 8월 11일 

 

누나 

김영혜 

1948년 10월 16일 

전 제일화재해상보험 이사회 의장 

남동생 

김호연 

1955년 4월 29일 

전 빙그레 회장 

배우자 

서영민 

1961년 11월 17일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 딸 

장남 

김동관 

1983년 10월 31일 

한화큐셀 전무 

차남 

김동원 

1985년 8월 20일 

한화생명 상무 

삼남 

김동선 

1989년 5월 30일 

전 한화건설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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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정보

멘로대학교 경영학 학사(1974년)
드폴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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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정보

태평양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1977년)
태평양건설 사장(1978년)
한국화약그룹 회장(1981년)
제2대 북일고등학교 이사장(1981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회장(1982년)
세계아마복싱연맹 수석부회장 겸 아시아지역 회장(1982년)
한미대양주협력회 이사(1983년)
한화이글스 구단주(1985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1991년)
경향신문사 회장(1992년)
아테네은행 회장(1993년)
헝가리 한화은행 회장(1996년)
성공회대학교 이사장(1997년)
한화석유화학 회장(2000년)
외교통상부 경제통상대사(2002년)
대한생명보험 대표이사 회장(2002년)
유엔평화대학 개발위원회 위원장(2004년)
한화그룹 대표이사 회장(2005년)
유엔한국협회 회장(2006년)
그리스 명예총영사(2007년)
한화그룹 대표이사 회장(2008년)
한화석유화학 대표이사 회장(2009년)
국제복싱발전재단 이사장(2009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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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정보

체육훈장 백마장(1982년)
철탑산업훈장(1983년)
체육훈장 맹호장(1984년)
체육훈장 청룡장(1986년)
금탑산업훈장(1995년)
그리스 대훈장(1996년)
대한적십자사 유공장(1998년)
제16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2009년)
밝은사회클럽 평화봉사대상 평화봉사부문(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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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정보

한화 1697만7949주(22.65%)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