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김은경 기자]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의 첫 번째 기업결합인 이른바 '대산 1호'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업재편은 허용하되, 결합으로 과점화가 심화되는 LDPE·EVA 시장에 대해서는 가격과 공급을 직접 규제하는 강도 높은 시정조치를 부과한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롯데케미칼, 롯데대산석화,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케미칼 간 기업결합을 심사한 결과 국내 LDPE 및 EVA 시장에서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가격 인상·인하율 제한, 공급 유지, 경쟁민감정보 교환 금지, 임직원 겸임 제한 등의 시정조치를 부과하기로 했다고 20일 밝혔다.
이번 결정은 정부가 추진하는 석유화학업계 사업재편을 승인하면서도 시장에서의 독과점 심화 가능성에는 제동을 건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4개사에서 3개사로…LDPE·EVA 시장 과점 심화 우려
이번 기업결합은 HD현대케미칼이 지난 6월 2일 롯데케미칼의 대산공장을 물적분할해 설립된 롯데대산석화를 흡수합병하고, 롯데케미칼이 합병존속법인인 HD현대케미칼의 주식을 추가 취득하는 방식이다.
결합이 완료되면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HD현대케미칼 지분을 각각 50%씩 보유하며 공동 지배하게 된다. 이에 따라 대산산단에 있는 양사의 나프타분해설비(NCC)와 석유화학 제품 생산시설이 통합 운영된다.
문제는 LDPE와 EVA 시장의 경쟁구조 변화다.
공정위에 따르면 결합 전 국내 LDPE와 EVA 시장의 주요 경쟁사업자는 한화, LG, 롯데, HD현대 등 4개사였다. 이번 결합 이후에는 3개사로 감소한다.
생산능력 기준 시장구조는 약 50:25:25로 재편된다. 판매량 기준으로는 3사 합산 점유율이 LDPE 82%, EVA 95%에 달한다.
특히 두 제품 모두 범용 석유화학 제품으로 상품 간 동질성이 높은 데다 사업자들이 경쟁사의 생산능력과 국제가격 등 주요 정보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위는 경쟁사업자 감소가 가격 경쟁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 공정위는 국내 LDPE 시장에서 과거 장기간 담합이 발생했던 전례도 들었다. 공정위는 2007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등 7개 사업자의 LDPE 판매가격 담합을 적발하고 541억75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당시 담합은 1994년 4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약 10년간 지속됐다.
이번 결합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HD현대케미칼이 신규 진입을 통해 만들어낸 가격 경쟁 압력이 사라질 가능성이다. HD현대케미칼은 2021년 말부터 에틸렌·프로필렌·폴리에틸렌 등 석유화학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판매해 왔다. 공정위는 이 회사가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해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결합 이후 저수익·저가 그레이드 제품의 생산과 공급이 중단될 경우 제품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전반적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더욱이 국내 LDPE·EVA 제품의 주요 구매자가 중소 플라스틱 가공업체라는 점도 경쟁제한 우려를 키웠다. 납품처의 규격 지정으로 특정 제품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특정 그레이드 공급이 중단되더라도 다른 제품으로 쉽게 갈아타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쟁사들의 설비 가동률 역시 이미 95~100% 수준에 육박해 공급이 줄어들 경우 경쟁업체가 즉각 생산량을 늘려 이를 대체하기도 어렵다고 공정위는 봤다.
◆공정위, '가격·공급·정보' 3중 규제…5년간 관리
공정위가 내놓은 시정조치는 단순한 행태 개선을 넘어 가격과 공급을 직접 관리하는 수준이다. 우선 향후 5년간 LDPE·EVA 국내가격 변동률을 수출가격 변동률을 기준으로 제한한다. 수출가격이 직전 3개월보다 오르거나 동결되면 국내가격 인상률은 수출가격 인상률 이하로 제한하고, 수출가격이 내려가면 국내가격 인하율은 수출가격 인하율 이상으로 해야 한다.
공급 중단도 제한된다. 기업결합 당시 생산하던 모든 LDPE·EVA 그레이드 제품에 대해 국내 수요자가 요청하는 물량을 공급하도록 했다. 저수익 제품을 중심으로 생산을 중단해 시장 공급량을 줄이는 방식의 가격 인상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경쟁사 간 정보교환에도 제동을 걸었다. 양사는 물론 계열회사를 통한 가격·수량·원가·재고량 등 경쟁민감정보 공유가 금지된다. 임직원 인사를 통한 정보 유출 가능성도 차단했다. HD현대케미칼과 롯데케미칼 간 임직원 겸임을 금지하고, 사업재편 과정에서 HD현대케미칼로 전적한 롯데케미칼 임직원이 복귀하는 경우에도 1년간 LDPE·EVA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이번 조치는 당사회사가 제출한 시정방안을 토대로 이해관계자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마련됐다.
공정위는 이번 기업결합을 통해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을 지원하면서도 시장 경쟁을 유지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석유화학 사업재편 제1호 기업결합을 신속하게 심사해 산업 구조조정이 차질 없이 추진되도록 뒷받침하면서도 경쟁제한 우려가 큰 LDPE·EVA 시장에 실효성 있는 시정조치를 부과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통합 법인인 HD현대케미칼은 이번 기업결합과 별개로 석유화학업계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협력업체와의 상생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다. 구체적인 방안은 향후 공정위와 협의해 발표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