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장우호 기자]구자열 LS그룹 회장은 1953년 3월 2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故 구평회 E1 명예회장과 문남 여사 사이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72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중장 출신으로 청와대 경호실 차장과 성업공사 사장, 전쟁기념관장을 지낸 故 이재전 장군의 딸 현주 씨와 결혼했다. 1978년 럭키금성상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뒤 1990년 이사대우, 1992년 일본지역본부 이사 등을 지내고 1995년 럭키증권이 LG증권으로 사명을 바꾸면서 LG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9년 LG투자증권에서 부사장까지 오른 뒤 2001년 LG전선으로 자리를 옮겨 2003년 사장, 2004년 부회장에 올랐다. 2008년 LS Nikko 동제련과 LS엠트론, LS전선 등 계열사 3곳에서 회장직을 맡았다. 2013년 사촌형 구자홍 LS Nikko 동제련 회장에게 LS그룹 회장직을 승계 받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뉴욕지사와 됴쿄지사, 동남지역본부장 등 오랜 해외 경험으로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다. 이외에 2009년 대한사이클연맹 회장, 2013년 국가과학기술심의위원회 민간위원, 2014년 제
[KJtimes=장우호 기자]구자엽 LS전선 회장은 1950년 12월 3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과 故 최무 여사 사이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69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명지대학교에서 국문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범한해상화재보험에 입사해 1993년 상무에 올랐다. 2000년 LG건설 대표이사를 지냈다. 2004년 당시 LG전선그룹에 편입된 가온전선에서 대표이사 부회장을 역임했다. 2008년 LS산전 대표이사 부회장, 2009년 LS산전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2013년 LS전선 대표이사 회장에 오르면서 동시에 JS전선과 가온전선 대표이사 회장도 맡아 겸임하고 있다. 2013년 취임하면서 "돈 안 되는 사업은 과감히 접어라"고 일갈했다. 이후 취임 직전인 2012년 2조7800억원(부채비율 888%)에 달했던 차입금을 2015년 9500억원(부채비율 330%)까지 낮추면서 LS전선의 재무건전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전선업계에서는 구자엽 회장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업 구조조정과 짠물 재무경영에 나선 게 유효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재무구조 개선…
[KJtimes=장우호 기자]구자홍 LS Nikko 동제련 회장은 1946년 12월 11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과 최무 여사 사이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3년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유학시절 배우자 지순혜 여사와 만나 연애결혼했다. 1973년 반도상사(현 LG상사) 사업부 수입과로 입사해 1979년 홍콩 지사장 부장을 거쳐 1983년 럭키금성상사 싱가폴지사 본부장을 지냈다. 1987년 금성사로 자리를 옮겨 해외사업본부 상무로 있다가 이듬해 전무로 승진, 1991년 금성사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기 전까지 주로 해외에서 활동했다. 덕분에 GE, 모토로라,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 CEO들과 교우가 깊다. 1994년 LG전자로 사명 변경과 함께 사장으로 승진, 1998년 부회장과 2002년 회장을 역임했다. 2004년 LS그룹이 LG그룹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LS전선과 LS산전에서 회장직을 맡았다. 2008년 LS그룹 지주회사 체제 전환 후 LS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다. 2013년 사촌동생인 구자열 회장에게 LS…
[KJtimes=장우호 기자]故 구두회 예스코 명예회장은 1928년 9월 12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故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다섯째 동생으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5년 1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8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구 회장은 매일경제 기고를 통해 유학시절을 회고했는데,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사과정에 올라 전공의 끝을 보고자 했으나 결국 학자금이 끊겨 귀국해야만 했다고 전했다. 귀국한 뒤 1958년 10월 한일은행에 입행해 10여년간 대전지점장과 부산지점장, 비서역을 거치고 1969년 8월 금성사에 전무로 입사했다. 1970년 전무를 역임한 후 범한화재해상보험 사장에 올랐다. 1975년 한국콘티넨탈카본, 희성산업 사장을 겸직하고 1976년 금성계전 사장을 맡았다. 1979년 대한반도체를 인수해 1980년 미국 AT&T와 합작으로 금성반도체를 설립했다. 금성반도체는 AT&T의 첫 해외 합작회사였다. 이후 락희화학 뉴욕사무소장, 호남정유사 사장을 지내고 여수에너지사, 럭키금성상사, 럭키금성경제연구소에서 회장을 지냈다. 1989년 한
[KJtimes=장우호 기자]故 구평회 E1 명예회장은 1926년 6월 3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故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의 넷째 동생으로 태어났다. 1살 위인 장조카 구자경과 진주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1951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락희화학(현 LG화학)에 들어가 경영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2년 故 문흥린 금릉원예조합 이사장의 딸 故 문남 여사와 결혼했다. 락희화학 뉴욕사무소장, 호남정유사 사장, 여수에너지사와 럭키금성상사, 럭키금성경제연구소의 회장 등을 지냈고, E1의 전신 여수에너지를 설립했다. 재계 원로 가운데 드물게 영어와 일본어 등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재계의 외교관으로 불렸다. 한미경제협의회 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 국제회장,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일경제협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대외적인 행사보다는 사업에만 전념하는 범LG가의 가풍속에서 가장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특히 국민의 신망이 높고 외국과의 관계를 잘 풀어갈 수 있는 ‘국제적인 마당발’이라는 이유에서 2대 월드컵유치위원장도 맡았다. 340억원의 유치기금을 조성하면서 당시 일본의 단독개최로 기울던 월드컵을 한·일 공동개최로 이끌어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KJtimes=장우호 기자]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은 1923년 6월 24일 LG그룹 창업주 故 구인회의 셋째 동생으로 태어났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故 최무 여사와 결혼한 뒤 후쿠오카고등학교를 나왔다. 후쿠오카고를 졸업하고 징병으로 만주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광복군으로 귀국한 뒤 1950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 서울 창신동 집에서 화장품 연구에 몰두해 투명크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하자마자 부산대 사범대 부속국민학교 교사 생활 중이던 장조카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락희화학에 전무로 입사해 큰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깨지지 않는 크림통 뚜껑에 목말라하던 구인회 창업회장을 도와 LG가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3년 락희화학이 서울 사무소를 낼 때 기반을 닦은 것도 구태회 명예회장이었다. LG그룹의 전신인 금성사와 럭키금성그룹에서 경영인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제1공화국에서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유당 후보로 고향인 진양에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다시 진양군에 출마했다가
[KJtimes=장우호 기자]구본준 LG그룹 부회장은 1951년 12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故 하정임 여사 사이 4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사업가 김광일씨의 딸 김은미씨와 결혼했다. 1970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8년 서울대학교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을 거쳐 1982년 미국 AT&T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했다. 경영 참여는 1985년 금성반도체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시작했다. 1987년 금성사로 자리를 옮겨 1989년 정보기기 담당 이사대우, 1994년 모니터 OBU장 상무, 1995년 비디오 SBU장 상무를 역임했다. 1996년 LG화학에서 전무직에 올랐고, 1997년 LG반도체로 자리를 옮겨 그해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1999년 LG필립스LCD를 설립해 대표이사 사장을 맡다가 2004년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2007년 LG상사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0년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실적부진에 시달리다 자진사퇴하자 LG전자 부회장으로 복귀해 4년 8개월 동안 이끌었다.…
[KJtimes=장우호 기자]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1949년 3월 26일 부산에서 아버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어머니 故 하정임 여사 사이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강세원 당시 희성금속 회장의 딸 강영혜씨와 결혼했다. 강씨는 구 회장이 희성그룹 회장에 오른 199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구 회장은 1998년 차경숙씨와 재혼했다. 1967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1976년 학사 학위를 받자마자 럭키금성상사(現 LG상사)에 입사해 1987년 금성사(現 LG전자) 이사, 1988년 희성금속 1990년 상농기업(現 희성전자) 부사장, 1992년 희성금속 부회장을 역임했다. LG가의 장자승계 원칙에 따라 형 구본무 회장이 LG그룹을 맡은 직후인 1996년 희성전선(現 가온전선, 2004년 LS그룹에 편입), 희성금속, 한국엥겔하드(現 희성촉매) 등 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희성그룹으로 독립해 현재까지 희성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희성그룹은 LG그룹과의 관계에 힘입어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남중학교 야구부 출신이다. 아버지 구자경 회장의 반대로 야구를 접었지만 여전한 야구광이며 야구 인프라에
[KJtimes=장우호 기자]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45년 2월 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 하정임 여사 사이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삼성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상학과에 다니다가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제대 후 미국 애쉴랜드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1972년 김태동 전 보건사회부 장관의 딸 김영식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구 회장과 결혼하면서 당시 이대 학칙에 따라 졸업하지 못했다. 대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술을 전공했다. 1975년 30세의 나이로 럭키(現 LG화학)의 심사과 과장으로 입사했다. 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처럼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차곡차곡 경영수업을 받았다. 럭키 심사과장, 수출관리부장, 유지사업본부장을 거친 뒤인 1981년에서야 금성사 이사로 승진했다. 1983년부터는 일본 도쿄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입사 10년만인 1985년에 기획조정실 전무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1989년 LG그룹 부회장에 오르면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1995년 LG그룹 회장에 올랐고 2003년 지주회사로 전환한 LG가 출범하면서
[KJtimes=장우호 기자]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故 구인회 LG 창업회장과 故 허을수 여사 사이 6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삼촌인 故 구평회 E1 명예회장과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같이 입학한 뒤 진수사범을 마치고 고향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에 이사로 합류할 때까지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당시 제자들 중에는 7선 의원을 지낸 故 신상우 전 해양수산부 장관,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회장 등이 있다. 신 전 장관은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구 명예회장의 별명을 밝히기도 했다. 진주공립고보 4학년이었던 1942년 5월 고향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의 대지주 하순봉씨의 장녀 하정임씨와 결혼했다. 1950년 락희화학공업사에 이사로 입사해 경영에 참여했다. 당시 구인회 창업회장은 구 명예회장을 공장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자게 하며 혹독하게 경영수업을 시켰다. 덕분에 구 명예회장은 현장에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1969년 12월 31일 구인회 창업회장이 뇌종양으로 세상
[KJtimes=장우호 기자]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1962년 1월 14일 ‘포니정’으로 불리는 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박영자 여사 사이 1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누나 정숙영씨와 여동생 정유경씨가 있다. 1980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결혼은 중매 반 연애 반으로 이뤄졌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난 김나영씨와 결혼했다. 연세대 수학과를 나온 김씨는 김성두 대한화재보험 사장의 딸이자 김성만 전 현대상선 부회장의 조카다. 아버지 정세영 명예회장으로부터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정 회장이 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방학마다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고된 잡일을 했다. 숙식도 독신자 기숙사에서 해결했다. 1988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현대자동차 회장에 올랐다가 1999년 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뜻에 따라 사촌인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차 경영권을 넘겨주고 아버지 정세영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산업개발로 계열분리해 독립했다. 그 해 3월 5일 정세영 명예회장은 서울 계동 현대사옥 대회의실에서 임직원들에 고별사를 마친 뒤 회의실을 나서며 울음
[KJtimes=장우호 기자]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1955년 8월 4일 故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주와 故 김월계 여사 사이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74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남가주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김월계 여사를 따라 교회를 다니다가 TBC 아나운서 출신인 홍인화씨를 만나 1980년 결혼했다.배우자 홍인화 전 아나운서와 슬하에 2녀를 뒀다. 1983년 만도기계 부장으로 입사해 1985년 전무에 올랐다. 1986년 한라공조 사장, 1989년 만도기계 사장, 1991년 한라건설 사장 등을 지내고 1992년부터 한라그룹 부회장을 지냈다. 한라그룹의 경영상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됐던 1997년 1월 회장직을 맡았다. 정 회장은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외환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룹 해체를 직면하게 됐다. 자신의 뜻을 펼치기는커녕 아버지 정인영 창업주가 공격적으로 펼쳤던 사업을 추스르기 바빴다. 자신의 집과 아버지 정인영 창업주의 집까지 팔면서 어렵게 경영하던 정 회장은 미국계 투자은행 로스차일드가 10억달러 규모의…
[KJtimes=장우호 기자]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은 1936년 12월 7일 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막냇동생으로 태어났다. 1955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동국대학교 학위를 받고,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현대건설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동갑내기 조은주 여사와 연애 결혼했다. 조 여사는 당시 현대건설 경리팀에 근무했다.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등 정주영 창업회장에게 크든 작든 기업체를 떼어 받은 뒤 독립한 형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독자적인 사업체를 꾸렸다. 정주영 회장의 말이 곧 법이었던 현대가에서 유학 제의를 거절하고 “나도 내 사업을 하겠다”며 동국대학교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8년 8월 직원 7명을 데리고 서울 영등포에 금강스레트공업을 창업했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 없던 건자재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유학 자금을 밑천으로 털어넣었다. 1970년 새마을운동이 일어나 슬레이트 지붕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공장에서 찍어내기가 무섭게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KCC가 짧은 시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확실한 납품처 ‘현대’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제법 돈이자 욕심
[KJtimes=장우호 기자]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은 1949년 5월 7일 故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회장과 박하경 여사 사이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8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고분자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해인 1978년 미원종합개발 대표이사로 입사하면서 경영에 참여했다. 이듬해 미원그룹 부회장직을 맡았고, 1987년 미원그룹 회장에 오르면서 사명을 ‘대상’으로 변경했다. 회장직에 오른 지 10년만에 회장직을 내놓으며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섰다. 1998년 서울 방학동 미원 공장을 전북 군산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하도급 공사 대금을 과다 계산하는 방식으로 회삿돈 219억6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년 7개월 동안 복역했다.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기념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2년부터 라마다호텔 등에서 최승갑 전 NKTS㈜ 대표를 만나 자신의도피행각을 돕도록 지시하고, 수사를 지연시켰다. 최 전 대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로
[KJtimes=장우호 기자]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은 1928년 6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아산마을에서 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넷째 동생으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를 거쳐 1953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54년 미국으로건너가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땄다. 1960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1965년 현대건설 태국 초대 지점장에 부임하면서 타이 파라티-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건설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7년 현대자동차가 설립될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의 권유로 초대 사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첫 국산 자동차 코티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4년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포니’를 개발해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참가했다. 1976년 포니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세계 시장에 첫 수출했다. 이 때 포니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어 1983년 10만대에 불과했던 생산시설을 2년 만에 30만대 규모로 늘리고, 1986년 포니를 미국에 첫 수출했다. 1987년부터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 회장에 올라 자동차, 중공업,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을 그룹 주력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