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정보]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KJtimes=장우호 기자]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1910년 10월 6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부, 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보부상 출신의 거상 故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와 故 정정숙 여사 사이 4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딸만 낳던 집안에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

동대문심상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거쳐 경성고등상업학교(해방 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1년 서울 서린동에서 저포전을 경영하던 명태순씨의 딸 명계춘씨와 결혼했다. 1932년 경성고상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행했다. 1936년 부친이 운영하는 두산그룹의 전신 ‘박승직상점'에 상무이사로 입사해 경영에 참여했다. 당시 근대적 경영방식인 출근부제도와 보너스제도를 도입했다.

1940년대 일본의 전시 통제로 박승직상점 경영이 어려워지자 미쓰비시 그룹이 운영하던 기린맥주 조선지부 대리점을 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박승직상점은 문을 닫았지만 일본 기린맥주의 국내 생산공장인 쇼와기린맥주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일본인이 소유했던 적산기업체였기 때문에 광복 이후 미군정청관리 기업체가 됐고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따라 관리지배인으로 있었던 그가 사장에 취임하게 된 것이다.

1951년 박승직상점을 두산상회로 상호를 바꿨다. 1952년 정부의 한수 이남 기업체 불하계획에 따라 쇼와기린맥주회사를 정식 불하받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오리엔탈 브루어리(Oriental Brewery)의 앞글자를 따 OB라는 상표를 붙였다. 1953년 두산상회를 두산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동양맥주를 중심으로 맥주 유통업과 무역업 등 수송사업에 뛰어들었다.

1960년대 들어 무역, 기계, 포장 등 각종 맥주 연관사업에 투자해 두산그룹의 외형을 키웠다. 1960년 연합뉴스의 전신인 합동통신을 인수하고 두산건설의 모태가 되는 동산토건을 설립했다. 1961년 합동통신 사장에, 1966년 회장에 올랐다. 1966년 한양식품을 설립했고 1967년 모기업인 동양맥주의 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윤한공업사를 세웠다.

1969년 동양맥주가 생산하는 OB맥주가 폭발적인 판매 증가에도 병이 부족해 생산량을 늘릴 수 없자 한국유리로부터 한국병유리를 인수했다. 1969년 동양맥주 회장에 올랐다.

1960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67년 회장에 오른 뒤 3선 회장을 역임했다. 1961년 벨기에 명예영사, 1968년 벨기에 명예총영사를 역임하며 우리나라와 벨기에의 우호와 경제협력에 힘을 기울였다. 1969년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직을 맡았고, 1970년 아시아상공연합회 회장에, 1972년 종신회장에 올랐다.

1969년 10월 한국이 경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절실했던 선진국의 자본을 유치하고 선진국과의 기술 협력을 이루어 내기 위해 태평양경제위원회(PBEC)에 가입하는 데 공헌했다. 한국이 PBEC에 가입한 이후 1970년부터 매년 한국 대표로 참석해 한국인 최초로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당선됐다.

두산은 친일기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부친 박승직 창업주가 일제강점기 일본자본을 유치하고 쇼와기린맥주 이사에 오르는 등 친일기업인으로 꼽힌다.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중앙조직에서 평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 단체는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미일관계마저 틀어지자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엄한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한 단체다.

박두병 초대회장이 1945년 광복 이후 소화기린맥주 지배인이 되고, 정부로부터 정식 불하받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1967년부터 별세한 1973년까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맡아 상공업계와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과 직위를 이용해 회사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상의 회장을 지내면서 외자도입심의위원도 함께 맡아 경제 문제와 관련해 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문에 자주 응했다고 한다. 당시 국내는 자본 축적이 미흡해 거의 모든 공장을 외자도입으로 건설하던 시기였다. 박 초대회장이 외자유치에 성공하고 돌아오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두산에 먼저 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누구나 혹할 만한 제안에도 박 초대회장은 끝내 사양했다. 이처럼 정직과 성실을 중요하게 여겨 세금 체납이 한 차례도 없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71년 제5회 세금의날을 맞아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두산그룹의 모토 '사람이 미래다'를 만든 장본인이다. 평소 기업경영에서 인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직원의 성실함과 유능함을 높이 샀으며 적성에 맞는 업무에 배치했다.

1973년 8월 4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바오로다. 그가 별세한 지 5년 뒤인 1978년 그의 호를 따서 연강재단이 설립됐다.

박두병 초대회장은 가족 간 화합과 평화를 중요시 여겨 자식 교육에 엄격했다. 두산그룹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만 33명에 달할 정도로 지분 분배 역시 일정한 비율로 골고루 나눠줘 형제 가운데 누구 한사람이 독단적으로 치고 나갈 수 없게 했다.

이 같은 박 초대회장의 가르침에 따라 두산그룹은 박용곤→박용오→박용성→박용현→박용만으로 이어지는 형제경영을 고수해오면서 가족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2005년 차남인 故 박용오 전 회장이 삼남 박용성 전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면서 두산건설을 통해 계열분리를 요구했다. 이로 인한 갈등이 폭로전으로 이어지면서 ‘형제의 난’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현재까지 무리 없이 경영권 승계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다만 막내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은 일찌감치 두산그룹을 나와 개인사업을 운영하고 있어 2016년 3세 경영체제를 끝내고 박정원 회장을 필두로 4세 경영체제의 막을 올렸다.

배우자 故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와 슬하에 6남1녀를 뒀다.

장남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1932년 4월 17일생으로 1951년 경동고등학교를 나와 1959년 워싱턴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여동생 박용언씨의 친구 故 이응숙씨와 결혼했다. 1960년 한국산업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1966년 한양식품에 입사해 경영에 참여했다.

1981년부터 두산그룹 회장을 맡다가 1991년 이른바 낙동강 페놀사건으로 인해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허남훈 환경처 장관과 한수생 차관도 함께 경질됐다. 1993년 두산그룹 회장에 복직한 뒤 1996년부터 현재까지 명예회장으로 있다.

장녀 박용언씨는 1933년 출생으로 당시 실력파 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김세권 검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세권씨는 광주고검 검사장, 대검찰청 차장과 서울고검 검사장을 지내고 현재는 법무법인 케이씨엘에서 고문변호사로 있다.

차남 故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1937년 4월 29일 태어나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뉴욕대학교 상학을 전공했다. 뉴욕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2년 미국에서 만난 故 최금숙씨와 혼인했다.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해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옛 OB베어스 구단주와 KBO 총재를 역임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1998년 두산그룹 회장을 맡았다가 2005년 형제의 난으로 인해 회장직에서 물러났으며 형사처벌까지 받았다. 2009년 11월 4일 스트레스로 인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삼남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은 1940년 9월 11일 출생이다. 1959년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을 전공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 뉴욕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혼인은 1966년 김선필 전 삼성물산 사장의 딸 김영희씨와 했다.

한국투자금융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두산식품에 입사해 경영에 참여한 뒤 1994년 오비맥주 회장, 2001년 두산중공업 회장을 거쳐 2005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대한유도협회, 국제유도협회 회장을 지냈고 각종 스포츠단체에서 다양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사남 박용현 연강재단 이사장은 1943년 9월 16일 태어나 1962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68년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1970년 외과학 석사, 1977년 외과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1968년 이화여자대학교 음대를 나온 故 엄명자씨와 인연을 맺었다.

1978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1993년 서울대학교병원 기획조정실 실장, 1995년 진료부원장을 거쳐 1998년 병원장까지 역임했다. 이후 국립대학교병원장협의회 회장, 대한병원협회 부회장, 대한소화기학회 회장 등을 지낸 뒤 2005년부터 두산연강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2009년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가 2015년부터는 예술의전당 이사장도 겸임하고 있다.

오남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회장은 1955년 2월 5일생으로 1973년 서울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뒤 1982년 보스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 당시 증권업계 대부로 통했던 강성진 전 증권협회 회장의 장녀 강신애씨와 혼례를 치렀다.

1977년 한국외환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두산건설 뉴욕지사에 입사하면서 경영에 참여했고 두산건설,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 등에서 근무하다 2012년 두산그룹 회장을 지냈다. 2016년부터 국립오페라단 이사장과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을 맡고 있다.

다양한 계열사와 해외에서 경영 실무를 두루 거쳐 오너 경영인이자 특출한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경영 일선에 뛰어든 이후 크고 작은 M&A를 진두지휘해 ‘미스터 M&A’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6년 새우가 고래를 삼키는 격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밥캣 인수, 두산중공업의 해수 담수화 플랜트를 가능하게 한 영국 수처리 전문업체 엔퓨어 인수 등이 대표적이다.

장남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을 통해 자녀 혼사에 정략 관계를 두지 말라는 박승직 창업주의 당부를 잘 지켜온 두산가에서 첫 재벌가 간 정략 결혼을 했다. 박 부사장은 구자철 한성 회장의 딸 구원희씨와 결혼했다.

육남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은 1960년 4월 3일생으로 서울고등학교, 인하대학교 무역학 학사를 거쳐 페퍼다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건 전 대호건설 회장의 딸 이상의씨와 혼인했다. 일찌감치 두산그룹에서 나와 개인사업을 펼치고 있다.


기본정보

생년월일: 1910년 10월 6일~1973년 8월 4일
직업: 기업인
직함: 두산그룹 초대회장


가족정보

관계 

이름 

생년월일 

비고 

부 

박승직 

1964년 7월 25일~1950년 12월 20일 

두산 창업주 

모 

정정숙 

 

 

남동생 

박우병 

1915년 1월 10~1988년 5월 21일 

전 두산산업 사장 

배우자 

명계춘 

1913년 1월 30일~2008년 9월 16일 

전 두산산업 감사 

장남 

박용곤 

1932년 4월 17일 

두산그룹 명예회장 

장녀 

박용언 

1933년 

김세권 법무법인 KCL 고문변호사 배우자 

차남 

박용오 

1937년 4월 29일~2009년 11월 4일 

전 두산그룹 회장 

삼남 

박용성 

1940년 9월 11일 

전 두산중공업 회장, 전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사남 

박용현 

1943년 9월 16일 

예술의전당 이사장, 두산연강재단 이사장 

오남 

박용만 

1955년 2월 5일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회장 

육남 

박용욱 

1960년 4월 3일 

이생그룹 회장 



학력정보

경성동대문공립심상소학교 졸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 졸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1932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1972년)


경력정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입행(1932년)
소화기린 관리지배인(1945년)
두산상회(현 두산글로넷BG) 설립(1951년)
동양맥주(현 OB맥주) 설립(1952년)
두산산업 설립(1953년)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설립(1960년)
합동통신(현 연합뉴스) 인수(1960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1960년)
합동통신(현 연합뉴스) 사장(1961년)
서울컨트리클럽 이사장(1965년)
한양식품 설립(1966년)
윤한공업사(현 두산메카텍) 설립(1967년)
제6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1967년)
한국병유리(현 두산유리) 설립(1969년)
동양맥주(현 OB맥주) 회장(1969년)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회장(1969년)
아시아상공연합회 회장(1970년)
대한상사중재협회 회장(1970년)
제7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1970년)
아시아상공연합회 종신회장(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1972년)
제8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1973년)


수상정보

동탑산업훈장(1967년)
제5회 세금의날 금탑산업훈장(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1973년)
벨기에 크라운장(1973년)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