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인물정보]故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

[KJtimes=장우호 기자]故 박용오 전 성지건설 회장은 1937년 4월 29일 故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과 故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 사이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뉴욕대학교에서 상학을 전공했다. 뉴욕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2년 미국에서 만난 故 최금숙씨와 혼인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두산산업에 입사해 1974년 전무이사를 달았다. 같은 해에 동양맥주 전무이사에도 올랐다. 1977년 두산산업 부사장, 1993년 두산상사 회장을 거쳐 1996년 맏형인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두산그룹 회장에 올랐다.

2005년 두산가 ‘형제의 난’을 계기로 두산그룹 회장직을 내려놓고 명예회장이 됐다. 명예회장에는 올랐지만 사실상 제명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08년 성지건설을 인수하고 회장에 올랐다.

그룹을 경영하면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올랐다. 1983년 OB베어스 구단주로 있었고, 1998년 KBO 제12대 총재로 올라 제14대 총재까지 연임했다.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격적인 경영으로 그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6년 12월 두산그룹 회장에 오른 직후 100일 동안 전 계열사의 100개 사업장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에도 오히려 직원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거뒀다.

동시에 대규모 현재 두산그룹의 알짜계열사인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의 인수를 이끌며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사업을 재편했다.

1999년 정부가 한국중공업을 민영화할 당시 현대와 삼성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부가 4대 재벌의 참여를 배제하면서 새 주인 찾기가 오리무중에 빠지자 두산이 입찰에 참여해 2000년 동부, 한화를 제치고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뒤 사명을 두산중공업으로 바꿨다.

2000년 두산인프라코어를 설립한 뒤 2005년 대우종합기계를 인수했다. 대우종기는 대우그룹이 IMF 사태와 분식회계 등으로 대우중공업에서 분할한 회사다. 대우종기 인수전에는 효성도 참여했지만 울산공장 화재와 창원공장 파업 등 악재가 연달아 터져 대외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두산은 중동 플랜트 수주시장을 100% 싹쓸이하며 인수전을 주도했다.

2005년 7월 박용오 전 회장은 큰형 박용곤 명예회장 등의 종용을 받고 그룹 회장직을 동생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에게 넘길 것을 요구받자 이에 반발해 이사회 하루 전날인 7월 21일 검찰에 ‘두산그룹 경영상 편법 활용’ 등 진정서를 제출하며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당시 박용오 전 회장은 두산산업개발을 그룹에서 분리해 독자경영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진정서에는 두산그룹 일가가 17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회삿돈 800억원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태맥, 일경개발, 넵스 등 일련의 회사들이 대부분 두산의 위장 계열사들이며 두산그룹 최고위층들이 비자금 조성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는 주장도 포함돼 있었다.

두산그룹은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지 2시간 만에 장문의 보도자료를 통해 "그룹 차원에서 박용오 회장의 퇴출을 결정할 것"이라며 "그룹과 가족에서 완전히 제명하고 아예 연을 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또 박용오 전 회장의 지시에 따라 진정서를 접수시킨 두산 춘천콘도 관리상무를 당일자로 해임하는 등 강하게 압박하며 반격에 나섰다.

동시에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두산 대표를 박용오 전 회장에서 유병택 당시 부회장으로 교체해 박 전 회장은 전경련 부회장에서 제외됐다. 2005년 10월 박 전 회장은 맡고 있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최고경영자 서밋 2005(APEC CEO Summit 2005)’ 의장직과 한-대만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직 등 전경련과 관련한 모든 직책에서 자진사퇴했다.

잠잠해졌던 형제의 난은 2015년 8월 검찰조사 도중 2차전이 시작됐다. 두산산업개발이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약 2797억원을 분식 회계했다고 자진 고백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두산측이 분식이 발생한 기간에 그룹 총수로 있었던 박용오 전 회장의 입지를 축소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에 박용오 전 회장도 반격에 나섰다. 오너 일가가 두산산업개발 유상증자에 참여하기 위해 빌린 대출금의 5년치 이자 138억원을 회삿돈으로 대납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참여연대와 언론은 두산산업개발이 고려산업개발과의 합병 때 분식으로 인해 합병비율 산정이 불공정하게 이뤄져 총수 일가가 부당 이득을 챙긴 점과 합병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고려산업개발의 주가를 인위적으로 낮췄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총수 일가가 분식을 통해 조작된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26억원 가량의 배당금을 챙겼다는 점과 두산산업개발의 유상증자 시 오너 일가가 신주인수권 중 상당수를 삼화왕관과 두산포장 등 계열사에 매각했다는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소액주주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일어났다.

2005년 9월 서울중앙지검 조사부가 두산산업개발 본사 건물에 대해 전격적으로 압수수색을 단행하면서 관련자들의 소환이 줄을 이었고 일부 인사들에 대해서는 출국금지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다. 국정감사에서도 여야 의원들이 두산 비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혹을 제기하며 두산그룹측을 압박했다.

검찰은 두산그룹이 10여년간 회삿돈 326억원 횡령, 비자금 366억원 조성, 2838억원대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박용오∙박용성∙박용만 세 형제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2006년 2월 1심에서 박용오∙박용성 전 회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80억원, 박용만 전 회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4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이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단 필요성’을 천명한 뒤 법원이 횡령∙배임 등 경제적 악영향이 큰 대형비리 사건을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가운데 발생한 재벌기업 비리 사건이었다.

그러나 1심 판결이 재벌기업 총수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는 ‘3∙5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여론이 일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역시 “국민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판결”이라며 비판하고 나섰지만 2006년 7월 대법원은 1심 판결을 유지했다.

결국 박용오 전 회장이 가족 및 그룹과 결별하고 오너 일가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두산가 형제의 난은 마무리됐다. 박용오 전 회장은 상고심에서도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했다. 반면 박용성∙박용만 전 회장은 상고를 포기하고 2007년 2월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돼 사면됐다.

형제 간 경영권 다툼으로 인해 2005년 12월 KBO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1983년 OB 베어스 구단주에 재직할 때부터 야구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왔던 박 전 회장은 1998년 KBO 첫 민선 총재에 오르면서 프로야구 행정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KBO 총재 3선에 성공하면서 총 2561일 동안 총재를 역임하며 최장 임기 기록을 세웠다. 제192021대 총재를 지낸 LG가의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2324일로 두번째 최장 임기 기록을 갖고 있다.

프로야구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2000년 페넌트레이스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시즌 타이틀 스폰서 제도를 도입했다. 국내에 프로야구가 처음 생긴 1982년부터 1999년까지는 올스타전과 포스트시즌에만 별도의 스폰서 계약을 체결했다.

국민스포츠로 자리잡은 프로야구의 위상에 걸맞게 방송중계료도 대폭 인상시켜 KBO가 자립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돔구장 건설 등 인프라 개선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자유계약선수(FA) 제도 도입, 경찰청 야구단 창단 등 선수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야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2005년 12월 11일 골든글러브 시상식을 끝으로 KBO 총재직에서 물러나면서 "70 평생을 살아오면서 KBO에서 지내온 7년은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말을 남겨 프로야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2008년 3월 건설업계 50위권의 성지건설을 인수했하면서 2년7개월의 공백을 깨고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사회간접자본(SOC)과 민간투자사업(BTL)을 활성화하고 주택사업의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등 공격적인 투자와 경영으로 성지건설을 국내 10대 건설사로 키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해 왔다. 그러나 건설경기 침체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성지건설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차남 박중원 당시 성지건설 부사장이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박중원 당시 부사장은 조모씨와 양모씨 등 공범 4명과 함께 2007년 3월부터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총 35회에 걸쳐 81억원의 회사 자금을 인출해 개인 사업 자금, 주식 투자 등 명목으로 사용해왔다. 2009년 7월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집안 안팎의 악재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기 못하고 2009년 11월 4일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두 아들을 가문과 그룹에서 다시 받아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2012년 4월 박용만 회장이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하면서 박용오 전 회장이 생전에 살던 저택 등 부동산이 경매로 나온 것으로 미루어 두산가에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배우자 최금숙 여사와 슬하에 박경원∙박중원 2남을 뒀다.

두 아들은 성지건설에서 각각 사장과 부사장을 맡고 있었으나 부도를 맞아 경영권이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두산그룹에서도 모든 직위와 지분을 내놓고 쫓겨났다.

차남 박중원씨는 2013년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박씨는 인터넷 쇼핑몰 운영자에게서 빌린 5000만원을 포함해 지인들로부터 1억5000만원을 빌려 갚지 않고 가로챈 혐의를 받고 2012년 11월 구속영장이 청구됐으나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지 않고 잠적했다.

2013년 3월 21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한 당구장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검거 당시 박씨는 자신은 박중원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나 지문 조회 등 경찰의 추궁에 결국 본인임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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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생년월일: 1937년 4월 29일~2009년 11월 4일
직업: 기업인
직함: 전 성지건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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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정보

관계 

이름 

생년월일 

비고 

부 

박두병 

1910년 10월 6일~1973년 8월 4일 

두산그룹 초대회장 

모 

명계춘 

1913년 1월 30일~2008년 9월 16일 

전 두산산업 감사 

형 

박용곤 

1932년 4월 17일 

두산그룹 명예회장 

누나 

박용언 

1933년 

 

남동생 

박용성 

1940년 9월 11일 

전 두산중공업 회장 

남동생 

박용현 

1943년 9월 16일 

예술의전당 이사장 

남동생 

박용만 

1955년 2월 5일 

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회장 

남동생 

박용욱 

1960년 4월 3일 

이생그룹 회장 

배우자 

최금숙 

 

 

장남 

박경원 

1964년 

전 성지건설 사장 

차남 

박중원 

1968년 

전 성지건설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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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정보

경기고등학교 졸(1956년)
뉴욕대학교 경영학 학사(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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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정보

두산산업 입사(1965년)
두산산업 전무이사(1974년)
동양맥주 전무이사(1974년)
두산산업 부사장(1977년)
한-그리스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1978년)
오비씨그램 대표이사 사장(1981년)
한-스페인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1982년)
OB베어스 사장(1983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1985년)
두산상사 회장(1993년)
두산그룹 회장(1996년)
바르셀로나대학 명예교수(1997년)
KBO 제12대 총재(1998년)
아시아-유럽비즈니스포럼(AEBF) 의장(2000년)
KBO 제13대 총재(2001년)
KBO 제14대 총재(2004년)
두산산업개발 대표이사 회장(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최고경영자 서밋 의장(2005년)
두산그룹 명예회장(2005년)
성지건설 회장(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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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정보

금탑산업훈장(1979년)
스페인 민간공로훈장 기사장(1996년)
벨기에왕립훈장(2000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한국의경영자상(2003년)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