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月19日の韓国大統領選挙は、韓国初の女性大統領を目指す保守系与党セヌリ党の朴槿恵(パク・クネ)氏(60)と、左派政権だった盧武鉉(ノ・ムヒョン)大統領の直系、野党民主統合党の文在寅(ムン・ジェイン)氏(59)による事実上の一騎打ちだ。勝敗は最後まで分からない「ジェットコースター」と言われる大統領選の現状と歴史は-。(ソウル 加藤達也)
韓国政界はセヌリ党、民主統合党の二大政党と左右の少数政党で構成されており、大統領選は最終的に保革による一騎打ちとなる。
両党はまず激しい党内闘争を繰り広げ、予備選で党公認候補を絞り込んだ。セヌリ党予備選には5人が出馬し8月の党大会で朴氏を選出。民主統合党は9月、文氏が公認候補となった。
だが、文氏選出直後、無党派層を中心に待望論が出ていたソウル大学融合科学技術大学院長、安哲秀(アンチョルス)氏(50)が出馬宣言。以後、支持率は4割前後の朴氏を2割台の文、安両氏が追う三つどもえとなった。
候補者登録(公示)直前の11月23日、安氏が出馬を撤回し、野党候補は、文氏に一本化。だが、安氏から文氏への支持層の流れは予想以上に少なく、文氏が安氏の「無党派票」をいかに取り込むかが、全体の勝敗に大きく影響する情勢だ。
◆任期は5年、直接投票制
韓国大統領選は5年に1度。大統領の任期満了日の70日前の最初の水曜日に投開票される。
大統領は現職の李明博(イ・ミョンバク)氏(2008年~)まで歴代10人。初代、李承晩(イ・スンマン)氏(1948~60年)は、国会で選出された。それ以後は軍人が政権を掌握後、大統領に就任するケースが相次ぎ、暗殺やクーデターが政権交代の契機となることもあった。朴正煕(パク・チョンヒ)氏(63~79年)と全斗煥(チョン・ドファン)氏(80~88年)はいずれもクーデターで政権掌握後、就任した。
87年に現行憲法が公布され、5年1期、再任なし、直接投票という現行制度がようやく整った。87年当選の盧泰愚(ノ・テウ)氏(88~93年)は現行制度初の大統領だが、やはり軍人出身だった。
92年に当選した金泳三(キム・ヨンサム)氏(93~98年)は軍人出身ではなく、32年ぶりの「文民政権」と呼ばれた。文民政権下、韓国社会は左派勢力が力を伸ばし市民団体の政治影響力が増大した。
続く97年の選挙で左派の金大中氏(98~03年)が当選し、路線継承者である盧武鉉氏(03~08年)まで2期10年、親北朝鮮の左派政権が続いた。
盧武鉉政権は「民主主義の実践」と清廉潔白さを前面に出して政権運営をしていたが、中流層以下の国民経済が悪化。その責任を追及され、07年の選挙ではハンナラ党(現セヌリ党)の李大統領に敗北し、政権が交代した。
◆格差の縮小・解消が課題
財閥企業の経営者出身の李大統領は、経済再建のために、国家経済を競争力がある大企業に牽引(けんいん)させる方式をとった。サムスン電子や現代自動車など大企業を、ウォン安誘導策や税制で優遇する政策だが、結果として国民生活水準の貧富格差が拡大したとされる。
格差の縮小・解消が内政最大の課題となり選挙でも大企業優遇政策見直しの方法論が争点化。文陣営は大企業の法人税率引き上げや富裕層の減税撤回などを提言、富裕層からの警戒感を生んでおり、選挙への影響が注目される。
■暗殺、クーデター… 過去の政権成立
1948年の建国以来、常に北朝鮮による侵略、共産化統一の危険に直面してきた韓国。左派と保守派が闘争を繰り返す中、歴代大統領の就任経緯もそれを反映した激しいものだった。
初代大統領の李承晩氏は第二次大戦中、朝鮮独立を目指した上海臨時政府の大統領で、共産勢力に対抗できる指導者と見た米国が後ろ盾となった。だが独裁から国民の反発を受けハワイへ亡命。2代目のユン・ボソン氏は反独裁勢力に支持されたが政権の内部闘争で民心を失う。
61年、朴槿恵氏の父親で陸軍少将だった朴正煕氏がクーデターで政権を掌握。63年から約16年間にわたり大統領として近代化に尽力したが、79年、側近に暗殺された。後継の崔圭夏(チェ・ギュハ)氏は80年、全斗煥氏によって権力の座を追われた。全氏は強権統治で知られたが、87年に当時の与党代表、盧泰愚氏が提示した憲法改正案を受け入れ、現在の選挙制度となった。
産経新聞 12月5日(水)11時30分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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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선"은 롤러 코스터, 승패는 끝까지 모른다
지난 19일 한국 대통령 선거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목표로하는 보수 여당 새누리 당의 박근혜씨 (60)와 좌파 정권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직계 야당 민주 통합 당의 문재인씨 (59)에 의한 사실상의 일대일 대결이다. 승패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 "롤러 코스터"로 불리는 대선의 현황과 역사는 -. (서울 카토 타츠야)
한국 정치권은 새누리 당, 민주 통합 당의 양대 정당과 좌우의 소수 정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통령 선거는 결국 보수와 진보의 일대일 대결이된다.
양당은 우선 치열한 당내 투쟁을 벌여 경선에서 당 공인 후보를 좁혔다. 새누리당 경선에 5 명이 출마 8 월 당대회에서 박씨를 선출. 민주 통합 당은 9월, 문씨가 공인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문씨 선출 직후 무당파 층을 중심으로 대망론이 나왔던 서울대 융합 과학 기술 대학원장, 안철수씨 (50)가 출마 선언. 이후 지지율은 40 % 전후의 박씨를 2 할대의 문, 안 두 사람이 쫓는 삼파전이되었다.
후보자 등록 (공시) 직전의 11 월 23 일 안씨가 출마를 철회하고 야당 후보는 문씨에 일원화. 하지만 안씨에서 문씨의 지지층의 흐름은 예상보다 적고, 문씨가 안씨의 '무당파 표 "를 어떻게 가져올 것인가가 전체의 승패에 큰 영향을 추세다.
◆ 임기는 5 년, 직접 투표제
한국 대통령 선거는 5 년에 한 번. 대통령의 임기 만료일 70 일 전 첫번째 수요일에 투개표된다.
대통령은 현직 인 이명박씨 (2008 년 ~)까지 역대 10명. 초대 이승만씨 (1948 ~ 60 년)는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이후는 군인이 정권을 장악 한 후 대통령에 취임하는 경우가 잇따라 암살과 쿠데타가 정권 교체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박정희씨 (63 ~ 79 년)와 전두환 (전 전두환) 씨 (80 ~ 88 년)은 모두 쿠데타로 정권 장악 후 취임했다.
87년 현행 헌법이 공포되었고, 5년 1기 연임없이 직접 투표하는 현행 제도가 드디어 끝났다. 87년 당선 노태우 (盧 泰 愚) 씨 (88 ~ 93 년)는 현행 제도 첫 대통령이지만, 역시 군인 출신이었다.
92년에 당선 된 김영삼 (金泳三) 씨 (93 ~ 98 년)은 군인 출신이 아니라 32 년만의 "문민 정권"이라고했다. 문민 정권, 한국 사회는 좌파 세력이 힘을 늘려 시민 단체의 정치 영향력이 증대했다.
계속 97년의 선거에서 좌파의 김대중 씨 (98 ~ 03 년)가 당선 노선 계승자 인 노무현 대통령 (03 ~ 08 년)까지 2 기 10 년, 부모 북한의 좌파 정권이 이어졌다.
노무현 정권은 "민주주의의 실천 '과 청렴 결백을 앞세워 정권 운영을하고 있었지만, 중산층 이하의 국민 경제가 악화. 그 책임을 추궁하고 07 년의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현 새누리 당)의 대통령에 패배, 정권이 교체됐다.
◆ 격차의 축소 · 해소가 과제
재벌 기업의 경영자 출신인 이대통령은 경제 재건을 위해 국가 경제를 경쟁력있는 대기업에 견인하는 방식을 취했다. 삼성 전자와 현대 자동차 등 대기업을 원화 약세 유도 정책이나 세제에서 우대하는 정책이지만, 결과적으로 국민 생활 수준의 빈부 격차가 확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격차의 축소 · 해소가 내정 최대의 과제가 선거에서도 대기업 우대 정책 검토 방법론이 쟁점 화. 글 진영은 대기업의 법인 세율 인상이나 부유층 감세 철회 등을 제언, 부유층에서의 경계감을 낳고 있으며,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주목된다.
■ 암살, 쿠데타 ... 과거 정권 성립
1948년 건국 이래 항상 북한의 침략, 공산화 통일의 위험에 직면 해 온 한국. 좌파와 보수가 투쟁을 반복 가운데 역대 대통령 취임 경위도 그것을 반영한 격렬한 것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씨는 제 2차 대전 중, 조선 독립을 목표로 한 상해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공산 세력에 대항 할 수있는 지도자가 본 미국이 후원자가되었다. 하지만 독재에서 국민의 반발 하와이로 망명. 2 대째의 윤 보성 씨는 반독재 세력에지지되었지만 정권의 내부 투쟁으로 민심을 잃는다.
61 년, 박근혜 씨의 아버지 육군 소장이었던 박정희 씨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63 년부터 약 16 년간 대통령으로 근대화에 진력했지만, 79 년 측근에 암살되었다. 후속 최규하씨는 80년 전두환 씨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전씨는 강권 통치로 알려졌지만, 87년 당시 여당 대표, 노태우 씨가 제시 한 헌법 개정안을 받아 현재의 선거 제도가되었다.
산케이신문 12월5일(수)11시30분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