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times=김봄내 기자]고 정주영 창업주의 진면목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미지와 얼굴을 보여줬던 탓이다. 불도저같은 저돌성으로 독특한 경영인의 모습을 보여줬는가 하면 수많은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 창업주를 얘기하는데 있어 ‘반역’이란 단어를 빼놓을 수는 없다. ‘현대’의 탄생에서부터가 부친에 대한 끝없는 반역으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정 창업주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 6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이곳에서 서당공부와 신문대학을 통해 전문가 버금가는 한문 실력은 물론 폭넓은 식견을 갖췄다.
그러던 그가 반역을 시작한 것은 15살 되던 해부터였다. 이 때부터 3년간 4번의 가출을 시도했다. 그의 부친은 그를 훌륭한 농군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의 행보는 줄기찬 반역이었던 셈이다.
4번째 가출(당시 19살)에서 성공을 거둔 정 창업주는 인천에서부터 부두노동자와 농사품앗이, 건축공사장 인부, 공장견습공 등을 하면서 서울진출을 시도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1938년에 경일상회를 설립한 다음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세우고 1947년 마침내 현대그룹의 모체인 현대토건사 간판을 내걸었다.
정 창업주의 또 다른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현대그룹을 이끌 당시 국내 재계인사 중 ‘최고 뉴스메이커’였다는 점이다. ‘정주영’이란 인물은 뉴스를 계속 공급하는 존재로 인식할 정도였다. 국세청의 추징세 납세거부와 정계진출설 등이 대표적 실례로 꼽히고 있다. 실제 그는 지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고관출신 사돈들을 그룹에 영입하지 않았던 정 창업주의 인사정책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는 유일하게 평범하지 않은 김동조•노신영씨 등 전직 고관출신 사돈들을 퇴직 후에도 영입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반면 평범한 사돈인 권영찬•현영원•이진호씨 등은 그룹 회장 또는 부회장으로 추대했다. 또 장정자•이영복•정희영•김영주씨 등을 독립을 주선해 줬다. 이 같은 인사 이면에는 평범하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정 창업주가 가장 좋아했던 곡 중 하나는 1980년대의 <해뜰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가사가 자신의 인생역정을 닮았다는 보통 인생을 배워 즐겨 불렀다는 후문이다.
정 창업주와 변여사는 며느리들을 아들보다 아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며느리들의 공통적 특징은 첫인상이 검소한 옷차림에도 하나같이 빼어난 미인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른 일화 하나. 정 창업주는 김포국제공항을 자주 이용했는데 그가 출국하는 날이나 귀국하는 날 공항 출입국장에는 예외 없이 일렬로 도열한 한 무리의 남녀들이 그를 맞이하거나 환송했다고 한다. 이들 무리는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