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한진해운, 역사 속으로…수송보국 꿈 바다에 묶여

[KJtimes=조상연 기자]한국 원양 해운업의 시초인 한진해운이 창립 4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수송보국(輸送報國)을 이루겠다던 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꿈도 꺾였다.

1977년 조중훈 창업주가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선사로 설립한 한진해운은 1978년 중동항로를 개척한 데 이어 1979년 북미서안 항로, 1983년 북미동안항로 등을 연달아 개설하면서 한국 컨테이너 해운업계를 이끌어왔다.

1988년 대한상선을 합병했고, 1992년 국내 최초로 4000TEU급 컨테이너선인 '한진오사카호'를 띄웠다. 이후 미국 시애틀, 롱비치 등 주요 항만에 전용 터미널을 세워 사세를 키우고 1995년 거양해운, 1997년 독일 2위 선사 DSR-Senator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렸다.

조중훈 회장이 2002년 11월 타계하자 셋째 아들인 조수호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섰고 해운업이 호황이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5750TEU급의 컨테이너선을 잇달아 인수하며 순항했다.

그러나 조수호 회장마저 2006년 지병으로 별세하고 이듬해 부인인 최은영 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선 뒤부터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리먼사태 이후 지속한 글로벌 해운업 불황 속에 운임이 호황기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데다 호황기 때 비싸게 장기 계약한 용선료로 인한 누적 손실때문에 회사 경영 상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최 전 회장은 결국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회사 지분과 경영권을 넘기고 완전히 손을 뗐다. 그러나 조 회장도 해운업 장기 불황 속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지난해 4월 25일 한진해운의 운명이 채권단에 넘어갔고 용선료 협상, 얼라이언스 가입 등 채권단이 내건 자율협약 조건을 이행했으나 부족 자금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요구는 끝내 충족하지 못했다.

결국 채권단은 8월 30일 자금 지원을 중단, 한진해운은 이틀 뒤인 9월 1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이후 선박 가압류 등으로 영업망이 무너지고 인력과 주요 자산을 매각한 한진해운은 법원의 파산 선고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한진해운이 무너지면서 국내 유일한 국적 원양선사가 된 현대상선의 어깨가 한층 무거워졌다. 현대상선은 그 동안 한진해운에 가려져 만년 2위 선사에서 국내 해운 '원톱'으로 올라서긴 했지만 여전히 글로벌 해운 불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쏟아지고 있다.








[스페셜 인터뷰]‘소통 전도사’ 안만호 “공감하고 소통하라”
[KJtimes=견재수 기자]“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변화는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공감과 소통이 어려워진 것이다.(공감과 소통의) 의미가 사라지고 충동만 남게 됐다.” 한국청소년퍼실리테이터협회(KFA: Korea Facilitators Association)를 이끌고 있는 안만호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디지털 사회로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이 같이 진단했다. 또 이제 공감능력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비대면 사회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통 전문가로 통하는 안 대표는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스마트폰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사회성은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지식의 산물이 되어 버렸다”며 “요즘 인간의 탈사회화가 진행되는 것에 비례해 인간성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거리를 두더라도 우리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체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이자 연대라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졌다”면